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그리스 (문단 편집) ==== [[아르콘]] ==== 원래 아테네에서는 왕이 쫒겨난 직후에 '''[[아르콘]]'''(ρχων)[* '첫째', '지배하는'이라는 뜻을 가진 [[고전 그리스어]] 동사 αρχ-에서 어원을 따왔다.]이라고 불리는 [[집정관]]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아테네에는 '''아르콘 에포니모스'''(ρχων πώνυμος), '''아르콘 폴레마르코스'''(πολέμαρχος), '''아르콘 바실레우스'''(ρχων βασιλεύς), 이렇게 총 3명의 아르콘들이 있었다. 가장 서열이 높은 사람은 '아르콘 에포니모스'였고, 국가 최고 책임자로서 반쯤 국왕이나 다름없었다. '아르콘 폴레마르코스'는 군사령관이었고, '아르콘 바실레우스'는 종교 관련 업무를 전담했다. 임기는 1년 가량이었지만 상당히 들쭉날쭉해서 큰 의미는 없었다. 아르콘들은 압도적 다수가 귀족 대가문 출신이었고, 임기를 마치면 '''아레이오스 파고스'''(아레오파고스)[* '아레스 신의 바위'라는 의미이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의도적 살인에 대한 재판 법정으로서의 기능도 했다.]라고 불리는 원로원에 해당하는 기구에 자동으로 들어갔다. 허나 [[솔론]]의 개혁 이후, 아테네의 권력이 민회 '''에클레시아'''로 옮겨가면서 아르콘의 지위가 크게 약화했고, [[클레이스테네스]]가 아예 상류층에게만 한정되었던 아르콘의 피선거권을 서민들에게 풀어버리면서 연달아 권위가 무너졌다. 특히 최전성기인 [[페리클레스]] 시대에 들어서는 아예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유명무실하게 만들면서 귀족층들의 반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앞에서 말한 '아레이오스 파고스'(ρειος Πάγος)는 아테네의 [[원로원]]에 해당하는 기구였다. 초기에 아테네가 왕정을 폐지한 다음 귀족들이 모여서 창설한 회의체였는데, 일반 서민들이나 평민들의 접근을 허락치 않으면서 그 어떤 기구보다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기구로 변했다. '아레이오스 파고스'라는 단어 자체는 '아레스 신의 바위'라는 의미로 이 바위 위에 모여서 회의를 열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솔론]]은 아레이오스 파고스를 개혁하면서 이 기구에 반역죄 처리권인 '에이산겔리아'와 법의 수호자라는 뜻의 '노모필라키아'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아테네의 사법부로 기능하면서 나름 권위있는 기관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아레이오스 파고스는 기원전 460년대에 들어서 점차 권한이 약화되면서 대부분의 기능을 민회에 빼앗겼고, 나중에는 거의 명예직 수준으로 전락할 정도로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로마]] 공화국에 편입되자 [[술라]]가 이 아레이오스 파고스의 기능을 크게 강화했고, 잠시 동안 아테네의 실질적인 권력기구라는 타이틀을 되찾았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진 못했고 로마 본국에서 파견한 총독에게 뺏겼다. 다만 아레이오스 파고스 기구 자체는 서기 5세기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ostracism-sherds.webp|width=100%]]}}} || || '''{{{#fff 실제 고대 그리스인들이 썼던 도편 조각들. }}}''' || 고대 그리스의 정치제도들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아테네]]의 '''[[도편추방제]]'''이다.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 이후 집권한 [[클레이스테네스]]가 또 다른 독재자의 출현을 우려해 만들었고, 도자기 파편 조각에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생각되는 인물의 이름을 적어내게 해서 이름이 '''6,000표 이상''' 나온 인물을 10년 동안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다. 그 10년 안에 다시 돌아오면 무조건 투석형에 처해 죽이거나 다시 사로잡아 도시 밖으로 쫒아냈다. 그렇지만 아테네 시민권과 재산은 빼앗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아테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10년간 금지됐을 뿐으로, 10년이 지난 뒤에는 돌아오거나 심지어 공직에 복귀하는 것도 허용됐고, 페르시아 전쟁의 경우와 같이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경우에는 기한조차 단축됐기 때문에, 고대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굉장히 온건한 정적 배제수단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이 도편추방제로 추방된 주요 인물로는 [[페리클레스]]의 아버지 크산티포스, 페르시아에 맞서 싸운 장군 아리스티데스, [[알키비아데스]] 등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아테네 민주정이 쇠락하고 [[중우정치]]로 전락하자 도편추방제가 민의의 절차라기보단 정적 제거용 수단으로 변질되고야 말았고, 결국에는 자연스럽게 폐지되고야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